생기(生ː器)_재형의 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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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CN갤러리 조회 63회 작성일 26-09-02 16:11생기(生ː器)_재형의 유희
윤호준 개인전
일시 2026.09.02.(수) ~13.(일)
장소 CN갤러리 (서울시 종로구 북촌로 5길 56-7)
영업시간 10:00~18:00 (월요일, 공휴일 휴무)
초대일시 9월 3일 18:00~21:00
9월 3일 오후 6시부터 9시까지 루프탑CN에서 행사를 진행합니다.
<생기(生ː器)_재형의 유희> 도슨트, 케이터링, 국악 앙상블 공연까지
별도 예약 및 입장료 없이 즐기실 수 있으니 가벼운 발걸음으로 들러주세요!
생기(生:器)_ 완결된 형의 유희라는 감각적 쓰임
변청자 | 미술학 박사, 미술평론가
윤호준에게 전통도자는 과거의 형식을 재현하기 위한 대상이 아니라,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는 현재의 조형적 대상이다. 그가 오래된 청자와 백자의 형상을 가져오는 이유는 원형 그대로 복원하거나 재현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이미 완결된 전통의 형식에 개입하여 그 안에 잠재된 다른 가능성을 끌어내고, 익숙한 도자의 질서 안에 낯선 장면과 사건을 발생시킨다. 그렇게 과거의 형상은 더 이상 고정된 유물이 아니라 현재의 감각과 만나 다시 작동하는 대상이 된다. 2021년 비평에서는 이러한 작업을 전통도자의 차용과 ‘아(我)’ 개입을 통해 형식과 의미를 열어가는 ‘도자유희’로 설명한 바 있다. 당시의 관심이 전통도자가 어떻게 놀이의 대상으로 전환되는가에 있었다면, 이번 전시에서는 그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간 질문을 던진다. 오랜 시간 도자를 가지고 놀아온 윤호준에게 이제 도자는 무엇인가.
그 답을 찾기 위해 그의 도자를 장르 바깥에서 바라볼 필요는 없다. 오히려 가장 익숙한 도자의 내부, 곧 그릇과 문양에서 시작해야 한다. 윤호준에게 도자는 우선 그릇이다. 그러나 그릇의 쓰임은 무언가를 담는 기능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전통의 그릇이 실용과 장식, 상징의 기능을 함께 품어왔듯이, 그의 작업은 여기에 또 하나의 쓰임을 덧붙인다. 그것은 익숙한 형을 다시 보게 하고, 움직이게 하며, 새로운 장면을 만들어내는 유희이다. 그의 최근 작업에서 중요한 것은 새로운 기형을 만들어내는 데 있지 않다. 이미 존재하는 그릇과 문양의 관계에 개입하여 그사이에 새로운 동작과 사건을 끼워 넣고, 익숙한 도자의 질서를 흔들어 그것이 다시 작동하도록 하는 데 있다.
이러한 시도는 백자에서 특히 선명하다. <백자청화탈호작대치문호>(2026)에서 항아리 표면에 있던 호랑이와 까치는 더 이상 문양으로서의 자리에 머물지 않는다. 둘은 항아리의 표면을 밀어내듯 몸을 밖으로 내밀며 서로 마주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이들이 빠져나간 자리가 깨끗하게 지워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릇 표면에는 문양의 윤곽선이 남아있고, 밖으로 나온 동물의 뒷면에는 표면에 있었던 것과 같은 짙은 청화가 그대로 드러난다. 문양은 표면을 떠나는 순간에도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흔적으로 남긴다. 이러한 ‘탈주의 흔적’은 문양이 평면적 이미지에서 입체적 형상으로 변하는 과정 자체를 가시화한다. 이제 문양은 그릇을 장식하는 부수적 요소가 아니라 표면을 벗어나 공간을 점유하고, 그릇의 바깥에서 새로운 장면을 만들어내는 조형적 힘이 된다. 2021년 작품 <백자청화송하탈호작문호> 등의 작업에서 시작된 ‘탈주’가 이제 단순한 형상의 돌출을 넘어, 문양과 기형 사이에 사건을 발생시키는 조형 원리로 발전한 것이다.
청자에서는 같은 유희가 다른 방식으로 나타난다. 백자가 문양을 표면 밖으로 끌어낸다면, 청자는 기형과 그 위에 놓인 형상에 행위를 부여한다. <보주를 찾아서>(2024)의 사자는 더 이상 향로를 받치는 장식적 존재에 머물지 않는다. 잃어버린 보주를 찾기 위해 몸을 낮추고 앞으로 나아가는 자세를 취함으로써 정적인 기물에 탐색의 시간을 만들어낸다. <신안사자향로보주기>(2026)에서는 이러한 행위가 더욱 구체적인 장면으로 발전한다. 두 개의 보주를 가진 사자가 그중 하나를 건네려는 듯한 자세를 취하면서, 향로의 발[足]과 사자는 하나의 기물 안에서 서로 호응하는 관계를 형성한다. 중요한 것은 사자가 단순히 생명체처럼 표현되었다는 사실이 아니다. 작가는 정지된 기형과 형상 사이에 하나의 행위를 끼워 넣음으로써, 기물이 머물러 있던 시간을 하나의 장면으로 전환한다. 거기에 더해 향로를 지탱하던 세 개의 발에도 미묘한 변주가 가해진다. 얼핏 지나치기 쉬운 작은 개입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아야만 발견되는 이 섬세한 유머는 사자의 움직임과 호응하며 기물 전체에 유희의 감각을 더한다. 이처럼 윤호준의 ‘도자유희’는 눈에 띄는 형상의 변형에만 머물지 않고, 가장 사소해 보이는 부분까지 슬며시 건드리며, 기물 곳곳에 놀이의 흔적을 남긴다.
<청자상감찬보매병>(2026)을 함께 놓으면 작가가 청자를 어떻게 다루는지가 더욱 분명해진다. 이 작품에서 매병의 어깨 부분을 장식하던 문양은 마치 보자기의 한쪽을 들어 올리듯 위로 들려 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무언가를 ‘탈주’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완결된 기형에 새로운 동작을 부여하는 것이다. 매병의 곡선과 상감의 정교한 장식은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그 위에 놓인 형상이 기물에 움직임을 만들어낸다. 이때 청자의 문양과 기형은 서로 분리되지 않고, 오히려 기형의 섬세함과 문양의 정교함이 새로운 행위를 받아들이면서 하나의 장면을 형성한다. 윤호준에게 청자는 과거의 기형을 재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잠재된 다른 움직임을 발견하여 현재로 호출하는 것이다.
<달에게로 가는 길>(2025)은 이러한 탐색을 조금 다른 차원에서 보여준다. 둥근 백자의 형상은 달항아리를 연상시키지만 완성된 달항아리를 재현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아(我)’가 무중력 상태에서 달을 부여잡을 듯 둥근 형상을 향해 몸을 뻗는 장면이 의도하는 것은 도달한 결과보다 도달하려는 의지의 표현이다. 작가는 달항아리의 완성된 형을 제시하는 대신, 그것을 향해 나아가는 상태를 작품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이러한 작업에서 그릇은 완성된 대상이 아니라 하나의 목표가 된다. 도자를 만드는 일은 형을 완성하는 일이면서 동시에 그 형에 끊임없이 접근하는 일이며, 그릇은 더 이상 완결된 결과가 아니라 계속해서 열려 있는 하나의 가능성이 된다.
분청에서는 이러한 태도가 더욱 적극적인 ‘형(再形)의 행위로 전환된다. 이 작업은 2024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으며, 이번 전시에서 하나의 중요한 축을 이룬다. <분청사기탈철화어문병>(2025)에서 물고기는 병의 표면에 그려진 문양을 벗어나 실제 공간으로 튀어나온다. 그러나 분청의 실험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분청사기파상조화쌍어문병>(2025)에서는 주병의 상·하부가 분절되고 서로 맞물리면서 기존의 기형이 새로운 구조로 재편된다. 상부가 하부를 받치면서 주병은 새로운 형태가 되고, 그 안에 있던 물고기와 물의 이미지 역시 이전과 다른 장면을 만들어낸다. 이때 분청의 조화·박지·철화로 이루어진 선(線)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다. 작가는 문양의 선을 따라 형을 나누고, 다시 그것을 결합한다. 문양으로 형을 해체하고, 해체된 형을 다시 문양과 함께 구성하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도자재형(陶瓷再形)’은 단순히 전통 기형을 변형하는 기법을 넘어, 문양과 형의 관계를 새롭게 조직하는 조형적 사고가 된다. 이는 윤호준의 조형적 실험이 전통 기형의 변형을 넘어 형과 문양의 관계 자체를 다루는 단계로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렇게 보면 청자·백자·분청이라는 구분은 단순한 재료와 기법의 차이에 있지 않다. 그는 각각의 도자가 지닌 조형적 특성을 서로 다른 방식의 유희로 전환한다. 백자에서는 문양이 표면을 벗어나고, 청자에서는 정적인 기형과 형상 사이에 행위가 발생하며, 분청에서는 문양을 따라 형이 해체되고 다시 구성된다. 방식은 서로 다르지만 그 방향은 같다. 이미 완결된 것으로 보이는 그릇의 상태를 흔들어 그 안에 다른 가능성이 작동할 여지를 만드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아(我)’ 역시 달라졌다. 초기의 ‘아’가 도자를 직접 만지고 끌어안고 올라타며 도자를 몸으로 경험하는 촉각적 주체였다면, 최근에는 ‘아’가 등장하지 않는 작품이 오히려 많아진다. 이것은 ‘아’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유희의 방식이 달라졌음을 의미한다. ‘아’는 하나의 인물에서 작업 전체를 움직이는 조형적 원리로 이동한 것이다. 따라서 ‘아’는 작품 안에 직접 등장하지 않아도 된다. 문양을 표면 밖으로 끌어내고, 동물에게 행위를 부여하며, 기형을 분해하고 다시 결합하는 유희적 행위 자체가 이미 ‘아’의 작동이기 때문이다. ‘아’의 점진적인 퇴장은 인물의 소멸이라기보다, ‘아’가 수행하던 행위가 도자의 형식 자체로 스며드는 과정이다.
그렇기에 윤호준의 최근 작업에서 유희는 더 이상 단순한 놀이의 즐거움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완결된 것으로 주어진 도자의 형식을 다시 열어 놓는 조형적 실천이다. 그에게 그릇은 무언가를 담는 데만 머물지 않는다. 익숙한 것을 낯설게 하고, 정지된 형에 사건을 부여하며,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대상을 다시 바라보게 하는 것 또한 도자를 통해 가능해지는 감각적 작동이다. 문양 역시 표면을 장식하는데 머물지 않는다. 밖으로 나와 형상이 되고, 형과 결합하며, 때로는 새로운 형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윤호준이 말하는 ‘생기(生器)’는 생명체를 닮은 도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고정된 그릇에 새로운 쓰임과 가능성을 부여함으로써 그것을 다시 살아 있는 ‘조형(造形)’으로 전환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결국 작가가 지난 십여 년간 이어온 ‘도자유희’는 하나의 주제를 반복해온 것이 아니라, 도자를 어떻게 다시 작동시킬 것인가를 탐색해온 긴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그가 주목한 것은 거창하게 새로운 도자 형식이 아니다. 오히려 너무 익숙해서 잊고 있었던 ‘그릇’이라는 도자의 출발점이다. 다만 이제 그 그릇은 과거의 쓰임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윤호준은 전통의 형과 문양에 유희를 개입시키고, 그 안에 새로운 동작과 사건을 불러낸다. 그 결과 그릇은 더 이상 완결된 유물이 아니라 새로운 가능성을 품은 열린 형식이 된다. ‘생기(生器)’란 바로 이 전환을 가리킨다. 오래된 그릇에 새로운 쓰임을 부여하여 그것을 현재의 감각 속에서 다시 살아 있는 대상으로 만드는 것, 이것이 윤호준의 도자유희가 달려온 지점이다.
2026.09.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