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리얼리즘_Digital Realism / 인사아트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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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art 댓글 0건 조회 7,294회 작성일 09-03-16 15:08
전시기간 ~
전시장소명

디지털리얼리즘_Digital Realism

2009_0304 ▶ 2009_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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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문_glassscape09-03_캔버스에 유채_97×162cm_2009



기획_사이미술연구소 이승훈

참여작가
최경문_최정혁_유용상_이은_이흠

2009_0311 ▶ 2009_0318
초대일시_2009_0311_수요일_05:30pm
세미나_2009_0311_수요일_06:00pm_심상용
관람시간 / 10:00am~07:00pm


인사아트센터
INSA ART CENTER
서울 종로구 관훈동 188번지 1층
Tel. +82.2.736.1020
www.ganaart.com



2009_0304 ▶ 2009_0315
초대일시_2009_0304_수요일_06:00pm


아트게이트 갤러리 뉴욕
ART GATE GALLERY New York
547 west 27th suite 301, New York, NY10001
Tel. +1.212.695.8971
www.artgateny.com


"Digital Realism"-Realism in Digital era 
디지털 리얼리즘을 주창하고 나선 작가들이 있다. 사실 이들이 지향하는 리얼리즘은 회화적 표현 결과물이 디지털적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이들의 리얼리즘은 디지털시대의 신인류가 가지는 지각방식과 감성방식에서 나타난 리얼리즘의 새로운 변화에대한 담론을 말한다. 이 변화는 포토리얼리즘 혹은 하이퍼리얼리즘으로 지칭되는 리얼리즘의 최근까지의 양상 이후 새로운 변화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점에서 볼 때 디지털리얼리즘은 하이퍼리얼리즘이라는 리얼리즘의 한계점에서매체발달과 시각환경 변화로 인하여 나타난 현대인의 지각과 감성의 변화에 따른 대안적 리얼리즘이기에 그 이전의 체계에 대한 연장이자 동시에 극복이라는 새로운 리얼리즘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포스트리얼리즘(Post-Realism)으로서의 리얼리즘의한 담론을 제시하고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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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문_glassscape08-150_캔버스에 유채_91×72.7cm_2008


『디지털리얼리즘』展에 참여하고 있는 최경문, 최정혁, 유용상, 이은, 이흠 위 작가들에의하면 정보혁명 시대를 살아가는 디지털시대의 신인류는 모니터등 디지털적 광학화면을 통해 사물의 이미지를 대부분 접하고 있기 때문에 사물에 대한 감성이 자연을 직접 눈으로 보고 자라났던 과거시대나 인쇄매체에 의해 퇴색된 화면을 통해 시각이미지를 접하고 자라난 시대와는 다르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과거 인류가 태양광 혹은 조명으로부터 시작된 빛이 사물에 반사된 상태에서 자연의 색채를 눈으로 직접 보며 자라왔다면 디지털시대의 신인류는 상당부분의 정보와 이미지를 사물에 반사된 빛에서의 색채가 아닌 모니터나 액정화면을 통해 광원 자체의 색을 직접 보며 자라왔다는 점에서 시각적 감각이 변화하게 된 특이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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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혁_Natural-Topia_캔버스에 유채_80×130cm_2009


따라서 디지털리얼리즘의 작가들은 매체환경 변화에서 나타난 신인류의 색채감성에주목하고 디지털액정이나 PDP 화면에서의 광원에서 시작된 색을 직접 인간의 망막으로 경험 하였을 때의 감성을 캔바스 위에 표현하고자 한다. 이전의 사진을 이용하여작업하던 작가들과 디지털리얼리즘 작가들의 차이도 이 지점에서 나타나는데 종이 매체에 재현된 색채의 채도와 모니터의 광원에서 재현된 색채는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이들은 인쇄 매체에서 재현되기 힘든 색채들을 형광물질이 포함된 채색재료를 적절히 사용하여 캔버스라는 매체 위에서 디지털시대의 감성을 재현해 낸다. 이들의 리얼리즘은 형태적이고 묘사적인 사실성뿐만 아니라 조명의 강도에 따라 강해지는 화면상의 휘도와 이때 극대화되는 광원의 빛을 보는 듯한 색채의 일루젼까지를 재현해내고자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팔레트위에 특수하게 제작된 모니터화면은 이들에게 있어서는 과거 사진을 대체한 화구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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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혁_Natural-Topia_캔버스에 유채_97×162cm_2008


이 작가들은 표현의 영역에서뿐만 아니라 사물을 지각하는 방식에 있어서도 디지털매체를 통한 인간의 인식능력 확장을 꾀하고자 한다. 디지털 카메라의 노출장치의조절과 기술적 발전과정에서의 광학적 감도 확장 곧 광학적 시각확대는 인간의 눈이 감지할 수 없는 색채와 명도 그리고 정밀도를 포착해 낸다는 점에서 리얼리즘을 다른 차원으로 발전시키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미지의 복제와 합성 및 변형이 가능한 컴퓨터 프로그램의 발달은 다시점과 다촛점등의 이미지들의 혼성을 통해 실제보다 더 실제 같은 가상적 실제들을 만들어 내고 있다. 사실 이러한 디지털시대의 특성들을 일부 작가들도 이미 활용하고 있는 것이 현재의상황이다. 그러나 여기의 디지털리얼리즘 작가들은 디지털시대의 시각환경 변화가 인간의 시각적 지각과 감성에 어떠한 변화가 오게 되었는지를 자각하고 이러한 변화를 어떻게 회화적으로 수용하고 표현영역을 확산시켜 나갈 수 있는지에 대해 처음으로 이론적인 고민을 하고 집단적으로 발언하기 시작한 작가들이라는 점에서 시사하는바가 있다고 본다. ■ 이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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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용상_INSTANT LOVE_캔버스에 유채_130.3×162cm_2009


디지털 리얼리즘, 또는 초색채 리얼리즘(hyper-colored realism)

1. 디지털 리얼리티, 디지털적 감성 
일련의 작가들이 역사와 사회, 사물에 대한 동일한 태도나 양식상의 공통점에 기반해 하나 의 유파를 출범시키거나 미적 노선을 선언하는 일은 지난 세기의 중반까지만 해도 매우 자연스러울 뿐 아니라, 불가피한 일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어떤 차원, 어떤 종류인가를 불문하고) ‘연대(solidarity)' 자체가 적잖이 계면쩍은 일이 되어버렸다. 그 이유에 대해 여러 설명들이 가능하겠지만, 어떤 미적 연대의 움직임도 거의 눈에 띄지 않는 것이 작금의 미술계 풍경이다. 복수의 작가들을 하나의 장으로 이끌어낼 만큼의 거시담론조차 폐기되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에 상응하는 만큼 구성원들의 의식이 개인주의화되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어떻든 미술의 축이 부단히 담론에서 비담론의 쪽으로-여기서 논할 수는 없는- 이동해 왔고, 해서 동시대미술에서 이즘(ism)이나 유파에 준하는 어떤 것을 논하는 것은 철지난 비즈니스로 간주되는 것이 사실이다. 여기서 yba를 떠올리는 일은 부디 없기를 바란다! 그들은 그들이 삶과 예술에 대해 남긴 질문들보다는 다른 맥락에서 언급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기 때문이다. 

담론으로서 미술의 시대는 이미 지나가버렸다는 언설이 더욱 설득력을 얻고 있는 것이 요즈막의 정서이기에 더욱, 여기 하나의 공통된 미학적 태도에 의거해 하나의 장을 마련하려는 다섯 명의 작가들이 흥미롭게 다가온다. 이들이 공동의 지지대로 삼고 있는 미적 토대는 그들이 속한 시대의 고유한 것으로, 그들을 따르자면 ‘디지털적’ 인식태도라 불릴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디지털 리얼리즘’이라 명명한 것의 중심, 곧 디지털 리얼리티를 형성하는 이 시대의 조건들이 이전의 것들과 어떻게 상이한가 하는 사실에 주목하고자 한다. 

디지털 리얼리티의 중심을 이루는 요체는 ‘디지털적 감성’이다. 이는 자신들의 이전, 그러니까 아날로그 세대를 살았던 이들의 감성과 자신들의 것 사이의 명백한 차이를 인식하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19세기의 감성이 자연에 젖줄을 대고 있었고, 20세기적 감성이 기계문명과 도시로부터 도래한 것이라면, 이들이 경험하는 21세기는 강렬한 빛을 쏟아내는 전자모니터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이 세대는 숲 속으로 난 오솔길을 걸으면서가 아니라 전자모니터를 마주하면서 생각하고, 태양광 아래서 사물과 마주하는 대신 일련의 코드와 전기적 빛에 의해 번역된 이미지를 경험한다. 이 두 경험 사이에 존재하는 급진적인 차이가 인문학의-미학을 포함한-기반을 위협할 것이라는 우려와는 달리, 이들은 이것야말로 자신들의 시대를 더욱 새롭게 하는 조형적 환경이라는 사실에 대해 어떤 의심도 가지고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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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용상_또다른 신의 숭배와 그리고 내려놓기까지.._캔버스에 유채_각 193.9×112.2 cm_2009


카메라의 기계적 재현 가능성과 결별하는 것으로부터 모던 아트가 출범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마치 필수품처럼 디지털 카메라를 메고 다니는 이 세대의 작가들은 태생적으로 안티 모더니스트(anti-modernist)들일 개연성이 크다. 이들은 뷰파인터를 통해 세상과 만나는데 조금도 어색함이 없어 보인다. 그 기억은 첨단의 전자 기억장치에-전자메모리-저장되었다가, 해석이란, 역시 아날로그적인 장치를 거치지 않은 채 (눈꼽만큼의 손상도 없이) 고스란히 불려나온다. 아니 훨씬 더 선명하게, 훨씬 더 빛나는 형태로 재생-재현이 아니라-된다. 이 전자메모리와 모니터, 곧 기억과 재생의 장치는 사물을 대하는 상황들 속에서 우리가 결코 그렇게까지 인식할 수 없었던 세부들, 특히 색들을 보여준다. ‘기억이 너무도 생생하다’는 것은 아날로그적 감흥일 뿐이다. 사실은 우리의 인식체계가 단 한 번도 그렇게 하도록 허용하지 않았던, 하나의 새로운 세계와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기억은 조금도 손상되거나 변질되지 않으며, 언제나 현재형일 뿐이다. 이전에는 이런 식으로 과거와 만나는 것이 불가능했다. 이 자리에 모인 작가들은 바로 이 지점, 보드리야르가 시뮬레이션(simulation)의 개념을 통해 포착하려고 했던, 이 ‘세계와 디지털 신세계’ 의 경계부위가 자신들의 회화에서 매우 중요한 담론의 발원지라고 말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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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_Catch me if you can_캔버스에 유채_80.3×116.8cm_2008


2. 색과 빛의 수렴 

참여 작가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목격하는 디지털적 감성, 디지털 리얼리티의 중심을 이루는 주제는 색채다. 색채에 대한 이들의 열정은(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지난 세기 초 야수파 작가들의-드랭(Andre Derain)이나 블라맹크 (Maurice de Vlaminck) 같은- 그것에 모자라지 않을 듯하다. 물론 마티스를 포함해, 이들만큼 색채에 대한 각별한 관심을 자신들의 회화적 모티브로 삼았던 작가들은 흔치 않았다. 이들이 공유한 단 하나의 미적 이념 또한 색에 대한 열정과 우정이었다. 이들은 색을 자연의 예속에서 해방시켜 그 자체가 지닌 자율적이고 독자적인 가치를 회복하고자 했다. 
하지만, 지금 이들은 이전 시대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색을 경험하는 것이 가능한, 또는 그렇게 경험할 수밖에 없는, 전례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전술했듯, 도시의 빌딩 사이를 거닐거나 물레방아 도는 시골길을 산책하는 것과 디지털 액정이나 PDP 화면을 통해 재현되는 가상현실 앞에 선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의미다. 중요한 점은 이들이 점점 더 그것과 마주하는 시간이 길어지는 전자모니터는 오로지 빛을 통해서만 이미지와 색의 재현, 재생에 가담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색의 경험이 점차 빛의 그것에 포개어지고 있는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전자모니터를 통해 경험하는 색채가, 망막을 통해 인식해 오던 색채와 비교하기 어려울 만큼 밝다는 사실이다. 그도 그럴 것이, 사실 색으로 감지되는 그것의 실체는 빛이기 때문이다. 정확히 하자면, 빛의 휘도에 의해 조정된 ‘비실재적이자 초실재적인’ 색이기 때문이다. 이 색은 자연광 아래서의 그것보다 훨씬 더 밝고 강렬한 것으로, 더 실재감을 지닌 것으로 지각된다. 보드리야르의 개념을 빌자면 초-색채(hyper-color)인 것이다. 실제로 모니터가 구현하는 색계는 사물계의 그것보다 훨씬 확장되고, 눈이 부실지경으로 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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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_Catch me if you can_캔버스에 유채_80.3×116.8cm_2008


이 작가들을 한 자리에 모이게 한 색채 담론을 따르면, 전자 파레트와 전자모니터의 색 구현이 이전의 자연광과 망막의존적이었던 것에 비해 보다 확장된 색채 경험, 세계인식에 기여한다. 더구나, 이들의 디지털 리얼리즘은 대상의 재현에 나섰던 전통적 리얼리즘에 동의하는 대신, 오히려 모니터 상에 전자 파레트가 구현한 이미지를 실재로 간주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이러한 경향과 전통적인 리얼리즘 회화사의 축적된 자산 사이에는 어느 정도 갈등이 야기될 수 있다. 보드리야르는 초실재(hyper-reality)가 실재(reality)를 억압한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렇다면, 이 경우에도 초색채가 실재의 색 체계를 교란한다고 할 수 있을까? ● 하지만, 이같은 질문은 적어도 이 자리에선 적절치 않아 보인다. 초점을 지나치게 관념적인 것으로 이끌어갈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사실은 이들은 모두 ‘매우 전통적인 의미에서‘ 화가(painter)에서 조금도 벗어나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이들이 설사 전자모니터가 구현하는 새로운 ‘색채 리얼리즘’의 효시를 선언한다 하더라도, 결국 물질계의 산물로 만들어진 안료와 캔버스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전쟁은 전자 파레트가 아니라, 나무 파레트에서 진행되는 것이고, 최종적인 병기는 인식이 아니라 붓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색채 담론의 노즐이 어느 정도 열린 것인가의 문제는 각자의 붓 끝으로 함축될 수밖에 없는 문제일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모니터 앞에 앉은 화가를 고전기의 선배들과는 다른 별종으로 구분할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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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흠_show-window story_캔버스에 유채_72×72cm_2008


3. 동시대 의식 
참여 작가들은 자신들이 다른 시대에 살고 있으며, 달라진 물적, 심적 환경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자 한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우리들 중 누구도 결코 자신의 시대를 벗어나서 사유하거나 그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들이 전자모니터와 고휘도로 구성된 리얼리즘을 들고 나온 것도 이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들에게 모니터는 고갱에게 열대 타히티의 풍경이 그랬던 것만큼이나, 세잔에게 생 빅토아르 산의 풍광이 또한 그러했듯, 실존적 조건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그 앞에서 마치 반 고흐가 태오에게 그렇게 했듯 전자서신을 주고받는다. 모니터는 세상으로 향한 열린 문이자, 통제소이다. 세계는 이 전자적 통제 아래서만 나와 관계 맺는다. 그 모니터를 통해 발광하는 고휘도는 루오의 비극적인 푸른색만큼이나 존재적인 무게로 다가온다. 그리고 프란시스 베이컨의 뼈와 살점들만큼이나 이들에게 초색채들(hyper-colors)은 그들의 감관을 건드리고 흥분시키는 실체들인 것이다. 더 많은 동시대의 관객들에게도 이러한 초색채가 더 사실에 가까운 것으로 읽힌다는 사실 또한 짚고 넘어가야 한다. 그들 역시 작가가 살고 있는 시대의 시민이므로. 이들은 모든 시대의 화가들이 그렇게 해 왔듯, 자신들의 회화를 자신이 살고 숨쉬는 시대에 더 긴밀하게 천착하기 위한 하나의 탐색의 장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맥락에서 이들의 태도는 리얼리즘이란 오랜 전통에 잇대어 있음이 분명하다. 시대가 변함에 따라, 이전 시대에는 과소평가되거나 무시되었던 어떤 경험과 인식의 측면들에 주도적으로 반응한다는 점에서, 때문에 더욱 변화된 심적 태도, 물리적 배경, 물질적 조건을 자신의 예술 행위에 개입시켜야 하리라는 각성의 측면은 이들을 19세기 리얼리즘 계보의 긴 연장선 상의 한 점에 놓이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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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흠_show-window story_캔버스에 유채_162×259cm_2009


4. 모니터의 안과 밖 
그것을 디지털 리얼리즘으로 부르건 초 색채 리얼리즘으로 명명하건, 아니면 전자 모니터 리얼리즘으로 하건, 이는 총체적 창작행위에 있어 언어적 기반에 대한 언술일 뿐이다. 진정한 리얼리즘의 저 안은 식상한 되풀이와 답보에서 벗어나 진정한 새로움의 잉태와 탄생을 갈망하는 심오한 역성의 태도를 품고 있어야 한다. 자기성찰, 또는 자기반성의 사유에서 솟아오르는 부정의 미학, 인간에 대한 시대와 사회의 억압들에 대해 ‘아니오’를 외치는 치열한 몸싸움을 숨기고 있어야 한다. 전술했듯, 이 자리에 모인 작가들의 형식적 모색에는 일정부분 리얼리즘의 정신이 내포되어 있다. 하지만, 그 유산은 여전히 열린 가능성인 채로 남아있다. 그것은 아직 하나의 모호한 지향성으로 설명될 뿐이지만, 참여작가 각자의 붓 끝에서 점차 분명한 것으로 가시화되어 나갈 것이다. 결국 전자모니터가 성취한 지각의 확장이 갖는 의미는 모니터 밖에서 만나는 세상에 대한 태도와 반응, 가난과 기아, 온갖 부조리, 전쟁, 오락만능과 감각의 타락, 자유의 억압과 권력과 억압, 사랑과 동정심의 문제들을 읽는 시선과 연동될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 심상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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