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의 대화: 『Vale Tudo』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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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art 댓글 0건 조회 7,069회 작성일 11-01-02 0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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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대화: 『Vale Tudo』展
칼럼니스트 방혜나


‘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텔지어의 손수건. /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애수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Vale Tudo』. Gallery AG 의 이번 기획전시 명을 들었을 때 파블로프의 개처럼 유치환의 시, <깃발>을 떠올렸던 것은 ‘Vale Tudo’가 함의하고 있는 이 건강하고, 저항적이며 도발적인 이미지 덕분이었다.

차가운 공기를 가르는 깃발의 펄럭임, 그 깃발을 흔드는 젊은 청년의 강인한 팔뚝, 그리고 그들의 우렁찬 함성소리, 이 모든 젊고 건강한 이미지들과 맞닿았을 때, 머릿속, 그리고 가슴을 울리던 신선한 흥분이 일었던 것이다.
 전시에 참여한 9人의 젊은 작가들에 대한 첫 인상은 젊고, 신선했으며, 저돌적이었다. 또 이들의 예술작품은 인간의 행복을 위한 희망찬 저항으로 읽혀졌다.

이들의 작품은 하나로 정의내리기에 다소 무리가 있어 보인다. 펄럭이는 깃발 틈새로 무언가 들릴 것도, 보일 것도 같지만 , 형체가 확연히 드러나지 않아 하나로 정의내리기는 힘든, 미정의 깃발들이기 때문이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펄럭일 때마다 틈새 사이로 무한한 가능성들이 보인다는 사실이다. 이들의 작품은 그래서 The ‘희망’ 적인지도 모르겠다.

평소 타인의 시선이 낯설고 부담스럽다는 김소희는 ‘그들만의 리그’에서 표류․ 방황하는 아웃사이더이다.  혼탁한 소통의 세계에서 한 발짝 빗겨서 있는 그녀만의 공간은 고독하고 몽환적이다. 그녀는 타인과 같지만, 또 다른 이 시․ 공간을 떠돌며 자아와의, 또 타인과의  대화를 준비한다. 고영준의 「붉은 방」이나 윤희선의 「꿈꾸는 종이비행기」, 홍순엽의 작품 도 개인과 개인, 개인과 사회 간 소통을 이루지 못해 방황하는 젊은 작가들의 고뇌를 엿볼 수 있는 작품들이다. 나와 타인 사이 메워지지 않는 괴리감으로 좌절하는 이들은 간극을 좁히고자, 끊임없이 소통의 틈새를 찾아 이동한다. 

진효선의 「I'm your father」와 노지현의 「One another life」, 오문섭의 「섬돼지」등은 타인의 시선에 길들여진 현대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들은 세계에 적응․ 타인과 타협․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사회가 규격화해놓은 제도나 이데올로기에 길들여져서는 안 될 것이라며 비틀고, 자기만의 한 줄을 당당하게 긋는 당돌함을 보이고 있다.

‘예술은 무엇인가. 과연 예술을 통해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사변적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뜬구름 잡는 것이 예술은 아닐 것이라는 정석우, 이희욱은 예술도 사회적 역할을 할 수 있다며, 이념간의 자유로운 소통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들의 작품은 현상과 의식의 흐름을 자유롭게 보여주고 있다.

개인과 개인, 개인과 집단, 이념과 이념 간의 소통을 바라는 이들의 강한 열망을 작품 전반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예술가들은 그림 밖 세상 속에서 고독과 카오스를 알아 버렸지만 결코 이에 굴하거나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 좌절로 얼룩진 갈팡질팡한 길에서조차 꿈과 자아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그들만의 깃발을 흔드는 이들은 모두 낙관적 꿈을 좇고 있다.  그 꿈의 대화 속으로 초대한다. 아홉 명의 작가들을 통해 작품을 보는 관객 여러분도 사회와 원활하게 소통할 수 있기를 바란다. 
 


-작가들의 전시 기획서

작가의 창작물이 온전히 그의 의지에 의해 탄생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작가를 둘러싼 많은 것들은 그에게 외부적 잣대를 쥐어주며 무엇이든 선택하라고 권한다. 이 강요된 선택을 인지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작업을 하는 이들은 창작을 위해 선택하고 이를 가공한다. 이 필연적인 선택의 지점에서부터 작가의 창작에 대한 의지가 발현된다.

따라서 관객이 작업의 결과물을 마주할 때 ‘작가가 그렇게 하도록 만든’, 동인(動因)은 작품에 담긴 이야기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열쇠가 된다. 작업을 진행하면서 작가는 자신이 원하는 결과물을 추구함과 동시에 이 행위의 시발점에 대해 여러 번 되묻는다. 일정한 시간의 사이클 안에서 시작점과 끝점을 오가며 스스로 질문하고 답하는 과정을 통해 작업의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무엇이든 좋다’라는 의미의 포르투갈어 ‘Vale Tudo’를 이름으로 내세운 우리는 형태, 개념, 장소 등 작업에 있어 마주치는 여러 가지 요소들에 대하여 스스로 한계선을 만들지 않는다. 구성원 개개인의 동인과 작업의 결과물로 다양한 색깔을 선보이면서 때론 서로의 색으로 새로운 색을 만들고 적합한 장소에 채색하여 그룹으로서의 결과물도 선보일 것이다. 

본 전시는 어떤 동인에 의해 우리가 함께 첫발을 내딛는 순간이다. 이는 넓게 본다면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의 움직임이며, 좁게는 구성원 하나하나의 움직임이다. 이 전시를 통하여 개개인의 결과물을 통해 각각의 동인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 시작점부터 전시장에 결과물을 내걸기까지의 과정은 명확하고 굵은 선으로 묘사할 수 없다. 두 간극을 되짚으며 무수히 많은 얇은 선들을 만들어 냈을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 우리는 개개인의 무수히 얇은 선들을 모아 Vale Tudo의 얇은 선긋기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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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노트 ① 고영준 : VOID WALKER]

1. 나는 언제나 내가 궁금하다.
내가 스스로 궁금한 까닭은 나 자신의 근본을 알고자 함 이라기 보다는, 나를 둘러싸고 있는 다른 선명한 모든 것들 알고 싶은 불가능에 관한 충동에 근거하며, 그 주변의 선명함들을 알고 싶은 충동은 또한 그들의 오목함과 볼록함이 이뤄내는 '나'를 더 알고자 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결국 나의 질문의 근원은 인과율이 마비된 무한반복의 또아리 이다.

2. 북유럽신화에서는 '궁극적인 앎(지식)' 이란 어떤 것에 이름 붙임이라고 말한다.
내가 이름 붙여지고 (그 것에 맞는 사회적 기능을 하며 구조요소로써의 나를  도구로 반응 하며 )살아가는 것은 '나'라는 것에 대한 '앎' 이 존재 한다는 것인데.
그 '궁극적인 앎'을 불리워지는 나는 가지고 있지 않다. 부르는 모든 내가 아닌 것들도 가지고 있지 않다. 내가 아닌 것들은 나를 구성하고 존재하는 듯 보이게 하며, 또 그와 같이 나를 흩어놓으며, 보이지 않게 만든다.
 그로 인해 '나'의 근본을 묻는 질문들 중 그 방법에 있어서 구체화되는 것 보다는 조금씩 해체시키고 발가벗기는 성찰적인 방법을 택하였다. '앎'을 위해 알 수 있는 것들을 털어 내고 털어내다 보니 희미해져가는 '어떤 것'만이 뚜렸해 졌다.  존재함의 근본은 존재함 자체나 그 타자에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그 스스로를 공(空,Void)으로 만들고, 스스로 공(空,Void)을 향해 나아 갈 때만 '근접'해질 수 있는  것이다.

3. 무한복제,  비목적적 재생산으로 점철된 이미지의 아성.
나는 그 안에서 살아지고 있다.
복제되고 재생산된 그 것들은 완결되고 확실한 듯 하여, 나로 하여금 지금의 시대를 살아가는 불완결의 미완자이며 불확실성의 뭉치로 존재하게 한다.
기능하고 반응해야할 나는 '나'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기능하고 반응해야 될 객체들에 의해  짜깁기된 '어떤 것'에 불과한 것이며, 심지어 '어떤 것', '그 것 자체(Things itself)이라고도 이름 붙일 수 없는 '      ' 로 있을 뿐이다.  하루하루 걷는 도시와 그 이미지들, 만나는 사람들과, 그 관계들은 너무도 선명하지만 나의 존재가 '      '에 불과하기에 그 모든 것들은 다시 또 무의미해지며 모든 인과와 목적이 발가벗겨진 채 부유할 뿐이다.

4. 나를 둘러싼 것들은 그리도 완결되며, 확실하여 그 이름 붙이기에 스스로 주저함이 없어 보이며, 그 무한한 복제 및 재생산의 장은 찬란한 시대를 맞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그 것들을 감각하고 인지할 주체로서의 나는 21세기가 닥친 지금도 '나'에 대한 근본을 물으며 상실의 시대를 맞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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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노트② 김소희 : ANOTHER PLACE]

나는 언제나 또 다른 공간을 꿈꾼다. 그리고 타인과의 관계는 또 다른 공간으로 향하는 창구가 된다.
사막이 있다. 그리고 그 안에 내가 홀로 있다. 사람들과 함께 있다 보면 나는 자주 이런 기분이 든다. 이는 현대 사회 속에서 개인이 느끼는 군중 속 고독감과는 또 다른 느낌이다. 이러한 기분은 나의 유년시절부터 이어져오는 개인적인 성격에서 기인된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어린 시절 혼자 있길 좋아하던 나는 밖에 나가서 친구들과 뛰노는 것보다 방에서 혼자 노는 것을 좋아하였다. 방에 홀로 있으면 방안의 소소한 것들, 물건뿐 아니라 벽지의 문양, 어디선가 들려오는 소리들 까지도 새롭게 느껴지고 하나의 형상으로 다가오곤 하였다. 그러한 요소들을 가지고 또 다른 곳을 상상하는 것은 나의 즐거움이었으며 즐겨하는 놀이 중 하나였다. 이러한 어린 시절 놀이가 현재의 나에게 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은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사회적 동물이라고 한다. 나 또한 사회적 동물로 나이가 들수록 인간관계의 범위가 넓어지고 있으며 방에서 혼자 있기보다 밖에서 사람들과 부딪히는 시간이 더 많아지고 있다. 그러나 내게 있어 타인과의 관계는 여전히 불편하며 두려움을 갖게 한다. 이러한 불편함과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나는 어린 시절 홀로 방에서 하던 놀이를 하기 시작하였다. 현실세계의 사람들 속에 있으면서 나만의 또 다른 장소를 만들어내기 시작한 것이다.

공간과 이미지가 결합되기도 하고 공간 안에 공간이 존재하기도 하면서 현실세계도, 그렇다고 가상세계도 아닌 지점 속에 자리 잡고 있는 나의 심리 상태를 작업으로 연결하였다. 바로 사막 속에서 또 다른 세계, 판타지를 꿈꾸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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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노트③ 노지현 : 변신 이야기]

최근 꽤 막막한 시간을 보냈다.
곰팡이 낀 방안을 들여다보지 않으려 온갖 불편함을 무릅쓰고 거실 한 켠에 이불을 펴고 몸을 구겨 넣는다.
그러면서 생각을 한다. 망상을 한다. 쓸데없는 상상을 한다. 이야기가 시작된다. 드디어 아무생각을 하지 않는다고 느끼는 순간, 그게 아니다. 그냥 그 속에 녹아들었을 뿐.
그렇게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나는 분열된다. 한 편은 도망치고 다른 한 편은 쫒아간다. 팽팽한 고무줄처럼 맞서는 둘.
어느 정도 그런 상태를 지속하다가 퍼뜩 정신이 든다. 이제 어느 한쪽에 힘을 실어주어야 한다.
끝없는 생각에 빠져들어 나뒹굴고 싶지만 그럴 수 없어서 할 수 없이 그 끈적거리는 심연 속에서 나를 끌고 나올 수 있는 ‘나’를 이미지화 시킨다. ‘무언가’가 된다. 그러면 다른 한편이 또 무언가가 되고, 그럼 상대방이자 분열된 또 다른 난 또 무언가가 되고, 그러면 또 다시...

반복에 반복에 반복.

그렇게 불쾌한 시간이 지나고 날이 밝으면 그 ‘끈적임’은 어쩔 수 없이 나를 놓아준다. 그러면 다시 하나가된 나는 어젯밤의 피곤하고 불쾌한 추격을 반복하지 않으려 두려운 시간이 오기 전에 다급히 “제거”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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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노트④ 오문섭]

오랜만에 집으로 내려간다. 차 창밖으로 보이는 모습이 어딘지 모르겠다.
알고는 있지만 내가 알던 그 모습그대로는 아니다. 시간이 지났다.
물론이다. 하지만 내 기억의 장면 장면을 다시 보고 싶은 것은 어쩔 수 없다.
하늘과 바다, 그리고 바람은 그대로이다. 그것이 여기가 거기였음을 상기시킨다.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여기는 엊그제 봤던 곳이 아니다. 또다시 변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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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노트⑤ 윤희선]

세계는 무궁무진한 기호들로 가득차 있고 하찮은 생명은 하나도 없거니와 그 경이롭고 아름다운 자연-지구에 산다는 것은 분명 축복이다. 그럼에도, 그것을 매 순간 느낄 수 있는 기회가 차츰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에 슬퍼졌다. 내면을 정화시켜주고 삶을 일깨워주는 에너지를 자연의 형태를 빌려 그려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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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노트⑥ 이희욱]

2009년은 21세기를 시작한 이래 (한국에서) 가장 충격적인 사간들이 일어난 해이다. 거의 매해 충격적 사건, 사고가 있었으나 같은 해에 3가지 이상의 거대 사건이 일어나긴 처음일 것이다. 이것을 단순히 우연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어떤 법칙에 의한 필연적 결과인가.

이명박 정부는 87년 민주화 운동과 노동자 대투쟁으로 일구어낸 모든 성과를 '반(反)노무현', '실용주의', '신자유주의'의 이름으로 송두리째 거부하고 있다. 언어는 사유와 떨어져 있지 않고, 언어를 지배하는 것이 곧 세계를 지배하기도 한다. 이명박 정부는 단어를 하나의 뜻으로 고정시키면서 세계를 지배해 나가기 시작했다. 용산의 빈민 저항은 테러리즘과 동일시되었고, 광우병 반대 시위는 반정부주의로, 쌍용 자동차 옥쇄파업은 반자본주의, 노무현 정권은 친북 좌파... 민중의 비폭력 평화적 저항은 그러나, 입법 - 사법 - 행정의 삼권과 언론, 극우파에 의해 무력해졌다.

지금, 국가와 극우 언론과 극우파들은 포그롬(* 차르시대 러시아 제국에서 있었던 반유대인 학살)을 연상시킬 만큼 과격해지고 있다. 단지, 그 대상이 외국인, 유태인이 아니라, 반 MB세력과 좌파를 겨냥하고 있다는 것뿐이다. 마르크스의 지적처럼, 사회의 표면을 뚫고 들어가 내적 운동의 법칙을 밝혀내는 것이  이 사태를 정상으로 돌릴 수 있는 방법일 것이다. 이 작업은 그 물음이다.

물신적 대상으로서의 도시. 상품은 물신의 화신이다. 도시는 이러한 상품의 유통을 근거로 세워졌기 때문에 물신적 대상(마르크스)이며, 또한 '돈의 필요라는… 무자비한 여신의 채찍질 아래에서'  달리고 뛰고 펄쩍거리거나, '투기라 불리는 괴물'에게 잡아먹히기 때문에 그렇기도 하다.

용산 학살은 물신적 대상으로서의 도시라는 관념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국가는 더 이상 일반 대중, 인민의 국가가 아님을 선언하는 일종의 선서와 같은 역할을 했다. 이것은 단지 ‘이명박 정부’만의 문제는 아니다. 실은 그의 뒤에서 그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정부의 ‘외부’에 그 기원을 찾아야 할 것이다. 5열사의 비극은 이미 그 이전 ‘무등산 타잔’을 기원으로 하고 있다. 빈민들의 주장은 자본에게 있어서 성가신 것일 뿐이고, 단지, 무시하거나, 여론이 악화되면, 국가의 힘을 빌리면 될 뿐이었다. 이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러하며 미래에도 그렇다. 독일의 무어인(K. 마르크스)이 그의 책에서 하나의 라틴어 경구를 말한다.

De te fabula narratur(이것은 당신의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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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노트⑦ 정석우]

저의 작업은 일상에서 겪는 일이나 공상을 저만의 사변적 공간으로 재해석하고 거기서 오는 괴리감을 통해 현대사회의 모습을 표현하는 것 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현대사회의 모습은 본질이 가려진 또는 흐려진 목표나 꿈을 쫒는 대다수 사람들의 흐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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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노트⑧ 진효선 : 전혀 가족사진]

어느 날, 캔디가 나에게 말했다. 나이를 한두 살 먹다 보니 어느 집에 가든 가장 잘 보이는 곳에 가장 크게 인화되어 걸려있는 가족사진이 자신의 집에만 없다고, 아마도 이는 사람들이 보편적인 가족 구성원으로써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아버지의 부재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노라고. 이야기를 하는 동안 그녀는 약간 풀이 죽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까짓 가족사진 아버지가 없어서 못 찍는 거라면 아버지가 될 만한 누군가를 찾아 나서자며 그녀의 어깨를 다독였다.

나의 작업에서 사탕은 무수히 복제되어져 그 실재의 존재 유무를 알 수 없으며 인공적인 무언가를 상징한다. 그러한 상징성을 가지고 있는 사탕의 개체들은 각각 이른바 ‘스펙’을 위해 살아가는 우리 시대의 사람들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좋은 부모 밑에서 자라 좋은 학교에 다니고, 좋은 직장에 다니는 스펙 좋은 사람이 ‘잘 사는 사람’의 표본이 된지 오래다. 캔디와 캔디의 어머니는 흔히 남들이 말하는 ‘잘 살고 있는 사람’이 되어 자신들의 가족사적 결함을 감추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고, 애비없는 후레자식 이라던가 서방 없는 년 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는 대신에 공장에서 만들어진 사탕처럼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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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노트⑨ 홍순엽 : Statement]

쉬이 예측하기 어려운 애매모호함으로 가득한 인간의 행위는 사회라는 구조 안에서 조직화되기도 하며 사회적인 것에 영향을 주기도 한다. 그리고 각 개인적인 차원으로 국한되지 않고 사회적 관계 속으로 확장되기도 한다. 그리하여 시대적, 문화적 변화에 의해 특정 행위에 대한 인간의 감정이 상이해지고 변화되어 간다. 즉, 인간의 행위는 사회적 관계 속에서 사회성의 변화에 따라 변화되는 특성을 지닌다.

산업화 이전의 사회에서는 왕권과 신권에 의해 인간의 행위가 지배를 받아왔으며, 근, 현대사회에서는 자본의 논리와 산업화라고 하는 새로운 거대 이데올로기에 의해 통제를 당했다. 자본은 인간의 사회적 지위를 결정하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인간 개개인의 개별적 감정까지도 통제하게 되었다. 또한 포스트 모더니즘 사회에서는 극대자본주의에 의해 통제를 받고 있으며, 제도가 제도를 낳고 또 다시 다른 제도로 채워지고 있는, 더 이상 새로운 제도들이 생겨나기 어려울 정도로 제도의 포화 상태가 되었다.

근래까지 끊임없이 이슈화가 되고 있는 남성성과 여성성에 대한 확고한 사회성에 대한 문제가 존재하고 있다. 최근 들어 그 차이의 간격을 좁히거나 무시하고자 하는 시도들이 매스미디어를 필두로 하여 일어나고는 있지만, 상업적인 목적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남성성과 여성성을 스스로 규정짓고자 하는 사회성은 여전히 강하게 지속되고 있다. 이것은 강제적 이성제도에 의해 신체의 양분적 구분이 섹슈얼리티와 일치해야 한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대다수가 자연스럽다고 생각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그것을 거스르지 않으려 하는 대중심리가 만연해 있는데, 사회가 만들어낸 수많은 규범에서 벗어나는 것을 꺼리는 것은 그러한 행위가 자칫 '일탈'로 치부될 수 있다는 두려움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회규범은 시대상과 함께 변하는 지배적인 가치관과 지배양식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에 '일탈'의 범주도 함께 변하게 된다. 에릭슨이 '일탈이란 행위의 고유한 속성이 아니다. 오히려 어떠한 행위를 직간접적으로 목격한 사람들에 의해 일탈적이라고 규정된 행위이다'라고 말한 것에서 그 의미가 확고해짐을 알 수 있다.

개인적으로 삶에 있어서 근본적인 억압과 통제의 규범은 신앙이다. 법규를 충실히 따르는 사람은 경찰을 두려워하지 않으나, 그 사회의 법규가 정의하는 크고 작은 죄를 범하는 사람은 경찰을 두려워하듯, 나에게 있어서 경외의 대상은 신앙이다. 인간이 쉽게 도달할 수 없는 하늘의 영역은 예로부터 신의 영역이라 생각되어 왔다. 물론 하늘이라는 물리적인 공간에 신이 있다고는 할 수 없으나 뜨거운 암흑의 공간으로 표현되는 땅 속에 지옥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밝고 어두움이 공존하는 하늘은 신의 영역이라고 추상적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리하여 작업은 어두운 저녁이나 밤의 하늘에서 볼 수 있는 빛의 색을 기본으로 하여 이루어져 있다.

작업에서 일차적으로 보여지는 그림자는 보이지는 않지만 빛(광원)의 존재를 나타내고 있으며, 그 빛에 의해 '자연스럽게' 나타나고 형성되는 그림자는 위에서 말한 일탈을 두려워하여 사회구조에 '자연스럽게' 종속되는 인간의 모습을 나타낸다. 자연환경에 따라 성장하고 소명하는 식물의 모습은 얼마나 자연스러운 자연의 법칙인가. 그러나 화분에 심겨진 식물은 그것과 관계를 맺고 있는 더 우월한 존재의 간섭에 의해 크게 제약을 받는다. 그리고 식물과 그림자의 중첩된 이미지는 분절된 시간의 기록이 아닌, 생성과 존재, 변화와 성장을 내포하는 유동적인 시간개념을 보여주고 있다.

사회가 변화함 따라 우리의 가치판단의 기준은 더욱 모호함으로 채워지며, 인간은 빠른 변화에 순응하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 사회가 끊임없이 만들어내고 있는 규범을 자연스럽게 따라가는 것을 택하고 있다. 그러한 과정에서 모든 개개인들은 공동체나 조직과 관계를 맺기도 하며 또는 동질적인 사람들과 강한 관계를 맺고, 이질적인 타인과의 약한 관계도 맺는다. 그러한 과정 속에서 위계적 관계가 생겨나며 어느 한쪽은 다른 쪽에 권력을 행사하기도 하며 크고 작은 영향을 미친다. 과연 우리의 삶을 통제하는 요소들은 얼마나 다양하며,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인지할 수 있을까. 그런 요소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것이 정말로 자연스러운 일인가.

2009.10 홍순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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