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OCI YOUNG CREATIVES 허주혜 개인전 《그 언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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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OCImuseum 댓글 0건 조회 5,104회 작성일 25-08-09 09:40그 언젠가
보다 입체적인 현재
모든 존재는 한 번뿐, 단 한 번뿐, 한 번뿐, 더 이상은 없다. / 우리도 한 번뿐, 다시는 없다. 그러나 이 / 한 번 있었다는 사실, 비록 단 한 번뿐이지만: / 지상에 있었다는 것은 취소할 수 없는 일이다.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제9비가」, 『두이노의 비가』 중에서
덧없는 존재의 순간은 그렇기에 아름답다. 잠시 머무는 모든 것들의 불완전한 현재는 순간적이기에 더욱 순수하고 진실되다. 존재는 곧 사라지지만 흔적은 오래도록 각인된다. 종이에 한 번 스민 먹처럼, 섬유의 낱낱을 물들이고 떠나가는 찰나의 획처럼 말이다.
도시의 피부 아래 켜켜이 묻힌 시간의 지층을 상상하는 일이란 사라진 것들의 잔해 위에 재건된 현재를 발굴하여 숨은 진실을 대면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허주혜는 자신이 살아가는 도시로부터 과거와 현재, 낡음과 새로움, 자연과 문명이 공생하는 풍경을 목격한다. 도시의 역사적 시간 속에서 어떠한 덩어리들은 표면 위로 불거지고, 또 다른 물질들은 보이지 않는 지하의 생태계를 순환한다. 흙과 모래와 금속의 파편들은 시대를 건너 매번 다른 모습으로 태어난다. 자연에서 비롯하여 자연으로 되돌아가는 각자의 운명 속에서 건물은 솟아오르거나 무너지고, 숲은 자라나거나 스러지기를 반복한다.
언젠가의 유물들
허주혜의 화면은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지시하는 ‘그 언젠가’에 관한 현재 시점의 기록이다. 이곳에 있던 것들의 잔상, 또한 여기에 남겨질 것들에 대한 공상을 통하여 가시적으로 드러난 모습 이상의 입체적인 현재를 포착하고자 하는 것이다. 수년 전 방문한 수원화성의 성벽이 마치 서로 다른 세상을 구분하는 결계와 같이 느껴졌다는 작가의 고백에 따라 도시 속 다양한 장소와 사물에 스민 시간의 밀도를 상상하여 본다. 최초의 시대로부터 현재의 순간을 향하여 늘어뜨린 저마다의 시간선과 그것이 품은 기억의 부피를 말이다. 긴 세월 한자리에 버틴 성벽의 품으로 걸어 들어가며 작가는 과거에서 발원하는 현재에 관하여, 또한 미래를 위한 유물로서 남겨질 현재에 대하여 생각했다.
그가 그리는 대상은 그간 스스로가 머문 도시의 건물과 유적, 유물, 그리고 자연이다. 작업의 초기 단계에서 주목하였던 것은 도시 구조의 바깥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실질적으로 도시를 가동하는 데 일조하는 사물들, 즉 건물 외벽의 그늘 속에 숨겨 둔 배관과 에어컨 실외기, 또는 쓸모를 잃은 우체통과 우편함 같은 사물들의 존재였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내부에 분명히 흐르고 있는 힘과 그것을 나르는 매개체들에 관한 특유의 연민 어린 관심은 허주혜로 하여금 도시의 생태를 유기적이고도 다층적인 것으로서 이해하도록 이끌었다. 도시라는 장에 흐르는 비가시적 동력에 관한 관심은 이내 더욱 깊은 지층에 내재한 힘, 유적과 유물에 깃든 역사적 시간의 힘에 대한 것으로 확장되었다.
때로는 가장 겸허한 것들이 살아남아 유물이 된다. 도무지 붙잡을 수 없는 현재의 속성들은 많은 경우 그 특유의 덧없음 덕분에 미래의 가치를 획득한다. 허주혜가 박물관에서 우연히 마주한 작은 돌도끼의 형상은 (2025)의 화면 위에 기념비적 규모로서 소환되었다. 구석기 시대로부터 건너 온 한 조각 주먹도끼는 오직 이름 없는 이의 둔탁한 손짓을 증언한다. 그의 화폭 안에서 대상들의 역학관계는 물리적 현실의 상태와 달리 전복되고 재배치된다. (2025)의 화면 중앙에 자리 잡은 거대한 항아리와 해태상은 유달리 묵직한 존재감으로 속세를 내려다보는 신화적 존재마저 연상시킨다.
획을 거듭 덧입힐수록, 그리하여 먹을 많이 머금을수록 대상은 강인해진다. 무수한 시간을 견뎌 온 사물들의 내면을 시각적으로 드러내는 일이다. 먹을 재료로 취하는 허주혜의 작업 과정 속에서 모든 찰나의 획은 종이 아래 유물처럼 묻힌다. 한 번 스민 먹은 중첩되는 농담 아래 잔상처럼 남아 자신의 흔적을 영구히 내비친다. 건축 현장의 지반과 기단처럼, 나아가 지표 아래 켜켜이 묻힌 역사처럼, 또한 현재를 덧씌울수록 무의식의 세계로 침잠하는 과거처럼, 최초의 획은 보이지 않는 저변에 언제나 오롯이 보존된다.
고요한 여백
네 개의 화폭을 격자식으로 맞붙여 완성한 회화 의 하단부에 놓인 두 비정형 캔버스는 각각 모서리 하나가 둥근 호로 치환된 부채꼴을 띤다. 이 부채꼴의 곡면이 각각 바깥을 향하도록 결합되어, 전체 화면은 상하가 역전된 아치형 창문을 연상시킨다. 뒤집힌 창문은 중력 위에서 미끄러질 듯 불안한 균형감을 암시함으로써 그것이 비추는 내부 세계의 초현실적 분위기를 증폭시킨다. 유연한 곡선을 윤곽에 도입함에 따라 회화는 관습적인 사각의 공간으로부터 탈피하는 한편 생략된 면적으로 하여금 시적인 여운이 되도록 한다.
사유는 침묵의 공간 속에서 생성된다. 일상의 소란으로부터 벗어나 진실을 좇는 자의 귓가에 사색의 가능성이 깃드는 것이다. 최근작인 (2025)의 화면 중심부에 놓인 거대한 분화구와 같은 여백은 무엇도 지시하지 않으므로 무엇이든 감지될 수 있는 미지의 고요이다. 그 비움의 무게로부터 명상과 창조의 모태가 될 호흡의 자리를 연상하여 본다. 비운 자리가 은유하는 것은 소실된 기록이자 망각된 기억이다. 그것은 적막이며, 미지를 향하여 무한하게 열린 생성의 공백이다.
화면 중앙의 텅 빈 공백은 (2025)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나는데, 여백 주위를 깃털처럼 감싸 안은 산맥의 세부는 나무 대신 빼곡한 고층 건물들이 빼곡하게 들어선 모습을 띤다. 그것은 한편으로 산을 허물어 세운 세상에 관한 반성적 관조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 도시의 생태 또한 자연의 일부임을 환기하는 중립적 눈길이다. 후자의 시선은 가치판단을 유보한 채로 자연과 문명이 결합된 풍경 그 자체의 고유한 현재를 관찰한다. 베인 숲의 터에 솟아난 콘크리트 건물들, 각종 광물과 목재로 구축한 인공의 산물은 여전히 본질적으로 자연에 귀속된 존재들이다. 사람이 길들인, 그러나 결코 길들여지지 않는 자연은 회색 건물의 틈새마다, 무너지고 불탄 폐허마다, 잊힌 공터마다 자신의 방식대로 움튼다.
현재를 그리기
어쩌면 우리는 말하기 위해 이곳에 있는 것이다: 집, / 다리, 샘, 성문, 항아리, 과일나무, 창문, — / 잘해야: 기둥, 탑…. 하지만, 너는 알겠는가, 오 이것들을 / 말하기 위해, 사물들 스스로도 한 번도 진정으로 / 표현해 보지 못한 방식으로.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제9비가」, 『두이노의 비가』 중에서
셀 수 없는 순간을 거듭 살아온 물질들이 쌓아 올린 풍경 안에서의 지금,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의 신비로운 교차로 위에서 수많은 현재가 맞닿는다. (2023-2024)이라고 이름 붙인 연작은 회화의 구성 요소들 사이 각기 다른 밀도의 차이를 극명하게 드러내어 보여준다. 화면 상단에 장엄한 형태로 우뚝 선 고궁은 오래된 기억의 잔상처럼 가느다란 윤곽으로서 묘사된다. 주위를 둘러싼 돌산과 돌탑, 비석, 불상의 두터운 질감은 그와 분명한 대비를 이루는 한편 바라보는 시선을 화면 하단의 복잡다단한 명암의 숲으로 인도한다.
허주혜가 화면을 구성하는 과정은 직관적인데, 비교적 큰 도상들을 먼저 배치한 후 작은 요소들로 사이의 여백을 메워 가는 방식이다. 따라서 대상은 우선적으로 묘사될수록 거대한 근경으로 나타나고 나중에 그려질수록 조밀한 원경으로 표현된다. 화면 곳곳에 둥실 떠오른 유물의 형상은 주로 유리 진열장에 전시된 작은 사물들을 내려다보며 관찰하는 작가의 시선을 따라 부감 시점으로 묘사된다. 그와 대조적으로 높다란 고층 건물과 고궁의 모습은 줄곧 아래로부터 올려다보는 관점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대상의 배열과 농담의 조절에 의하여 화면 위의 원근은 재배열된다. 다시점에서 관측한 혼합체로서의 현재는 그렇듯 복합적이고도 다변적이다.
몹시 무상한, 한시적인 존재의 의미는 바로 그 순간의 현재성에 깃들어 있는 것이 아닐까. 스스로 발화하지 못하는 사물과 풍경들을 대신하여, 어루만지는 손길과 말하는 입으로 증언하기 위하여 우리는 그저 잠시 이곳에 있는 것이다. 마주한 현재를 각자의 언어로 호명하고, 때로는 그것을 내일의 유물로 만들기 위하여서다. 문득 주위의 풍경을—그 자체로서 언젠가의 유물인 세상의 전경을 되도록 샅샅이 감각하여 본다. 끝없는 현재를 관통하여 나아가는 사물들과 그 누적된 흔적이 구축한 장면들을 보다 입체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고자 하는 시도다. 개인이 인식하는 현재가 저마다 고유한 탓에, 각자의 역사는 지극히 사적인 한편 무엇보다도 창조적이다.
박미란(큐레이터, 아라리오갤러리 팀장)
작가 약력
학력
2016 충북대학교 대학원 조형예술학과 석사
2014 충북대학교 미술과 학사
주요 개인전
2025 그 언젠가, OCI미술관, 서울
2022 오롯이, 공간시은, 전주
2021 머금은 채로, 그곳에, 학고재 아트센터, 서울
2017 뫼,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 청주
주요 단체전
2025 모든 드로잉: All Drawings, 청문당, 대구
Re:Art 프로젝트 1부: 어제의 형태, 오늘의 시선, 수창청춘맨숀, 대구
2024 대구예술발전소 14기 입주작가 성과전: 파편화된 알고리즘, 대구예술발전소, 대구
Mobility-Smart Young Art, 엑스코, 대구
2024 The Art Plaza, IBK기업은행 지하아케이드, 서울
유연한 틈; 시선의 그림자, 대구예술발전소, 대구
A Piece of cake, 갤러리 제이와이, 서울
2023 서사적 회화, 토포하우스, 서울
2022 2022 경기시각예술 성과발표전 생생화화 – 사이의 언어, 김홍도미술관, 안산
Re; Side, 수원시립아트스페이스광교, 수원
2022 수원 문화재 야행, 화성행궁, 수원
2021 아트빌리지 3!1!5!, 화이트블럭 천안창작촌, 천안
전남수묵비엔날레, 노적봉예술공원 미술관, 목포
수상 / 선정
2024 2025 OCI YOUNG CREATIVES 선정, OCI미술관, 서울
2022 기초예술 창작지원 선정, 경기문화재단, 수원
2021 충북미술가 서울 전시회 지원사업 선정, 충북문화재단, 청주
레지던시
2024 대구예술발전소, 대구
2022 수원아트스튜디오 푸른지대창작샘터, 수원
2017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 청주
연락
juhyeib@naver.com | @heo__juhy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