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니타스의 유령들

바니타스의 유령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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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913 조회 35회 작성일 26-06-28 13:02
작가 박인업, 박석
기간 2026-06-11 - 2026-07-05
관람시간 11-6
휴관일 월요일
장소 성수나무
주소 04774 서울 성동구 성덕정길 3-14 초록대문 (1층 & 2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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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니타스의 유령들: 길들여진 신체와 느슨한 기표》

Ghosts of Vanitas: Disciplined Bodies and Loose Signifiers


 

전시는 7월 5일(일)까지

월요일 휴무

11-6시 오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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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타자의 공간에서 돌아온 두 개의 시선

정물 사진의 기원은 회화를 모방하려는 기술적 필연에서 출발했다. 다게르와 헨리 폭스 탈보트를 비롯한 초기 사진가들은 17세기 네덜란드 바니타스 회화의 구도를 빌려와 해골, 모래시계, 시든 꽃과 과일을 배치했고, 이를 통해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라는 도덕적·종교적 메시지를 고정하려 했다. 그러나 모더니즘을 거쳐 동시대 미술에 이른 정물 사진은 더 이상 단일한 교훈을 전하는 수단이 아니다. 수전 손택이 지적했듯 사진은 세계를 재현하는 동시에 은폐하는 이중성을 지니며, 오늘날의 이미지들은 시뮬라크르처럼 원본 없는 복제물로서 진실의 불안정성을 드러낼 뿐이다.

박석의 사진은 이러한 정물 사진사의 계보를 이어받으면서도 이를 교묘하게 배반한다. 그의 작업은 명확한 정답(기의)을 제공하기보다, 실험적인 정물 구성과 시각적 착시, 의미를 끝내 유보하는 기호들의 조합을 통해 ‘느슨한 기표’의 장을 만든다. 여기서 정물은 종교적 도상이 아니라, 관객 각자의 기억과 경험을 불러일으키는 불안정한 라벨이 된다.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태그 스티커의 이미지들은 실험실 샘플이나 바코드를 연상시키지만, 실제 정보는 비어 있다. 이 빈 라벨은 관객이 자신만의 언어와 서사를 채워 넣어야 하는 해석의 여백이다.

반면 박인업은 도자와 브론즈라는 물질적 매체를 통해 눈에 보이지 않는 감정을 신체의 형태로 구체화하며 신체 정치학을 전개한다. 미셸 푸코가 『감시와 처벌』에서 분석했듯, 근대 권력은 신체를 규율하고 길들여 ‘순종적인 신체’로 만들어간다. 박인업의 작업은 외로움, 게으름, 긴장, 시작의 두근거림 같은 감정들이 어떻게 신체를 구부리고 굳어지게 만드는지 보여주는 ‘길들여진 신체’의 아카이브다. 동시에 그의 조각을 타고 흐르는 곡선들은 단지 굳은 몸의 윤곽이 아니라, 감정과 규율이 신체를 통과하며 남긴 시간의 궤적으로 읽힌다.

두 작가는 네덜란드와 유럽이라는 낯선 공간에서 각각 7~8년 동안 이방인으로 살았다. ‘제3의 공간’(중심과 주변의 경계가 교차하며 혼종성이 발생하는 지점)에서 자신만의 시각을 형성한 것이다. 이들이 돌아온 한국 사회는 여전히 기형적인 속도주의와 촘촘한 규율 시스템 속에서 성실함과 효율성을 절대적 미덕으로 요구한다. 이번 전시는 유럽에서 체화된 실존적 고립과 한국에서 마주한 사회적 압박이 이미지와 신체라는 각자의 차원에서 어떻게 발현되는지 탐구한다. 단단하게 길들여진 몸과 느슨하게 떠다니는 기표가 교차하는 이 공간은, 신체의 구속을 통해 이미지의 유동성을 붙잡고, 이미지의 미끄러짐을 통해 구속된 신체를 해방하는 역설적인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II. 신체의 아카이브: 박인업의 길들여진 신체

프로이트에 따르면, 애도는 상실의 대상을 명확히 인지하고 세계와 다시 화해하는 과정이지만, 멜랑콜리아는 무엇을 잃었는지조차 모른 채 지속되는 존재론적 공허를 동반한다. 박인업의 〈Melancolia〉는 이 불분명한 상실의 징후를 도자라는 매체로 붙잡아둔 작업이다. 유학 시절 홀로 음악을 들으며 웅크려 울었던 경험, “이불 밖으로 나와 있던 내 발마저 외로워 보였다”는 작가의 회고는 발이라는 신체 부위가 지닌 취약성과 타지에서의 고립감을 현상학적인 포즈로 치환한다. 여기서 몸은 자율적인 주체라기보다, 외부 시스템에 의해 고독해지도록 길들여진 신체의 단면이다.

〈Aesthetics of Laziness〉는 효율성과 생산성만을 미덕으로 삼는 사회를 향한 신체적 반론이다. 베개 밑에 손을 넣고 TV 편성표를 외우며 누워 있는 자세, 발가락으로 컴퓨터를 켜고 모니터 앞에서 서서히 녹아내리는 듯한 몸은 푸코가 말하는 규율 권력을 전복하는 비생산적 상태를 형상화한다. 이 작업은 ‘게으름’이 단순한 태만이 아니라, 과속하는 시스템을 잠시 멈추고 삶의 다른 차원을 사유하게 만드는 하나의 윤리적 선택이 될 수 있음을 시각적으로 웅변한다.

반대로 〈Graph of palpitation〉과 〈Little help for passive people〉, 그리고 〈Hooray〉는 무언가를 시작하는 순간의 긴장과 설렘을 다룬다. 단거리 선수의 출발 자세를 유도하는 ‘시작하는 의자’, 무거운 세라믹이 몸을 짓누름에도 이상하게 기쁘고 들뜬 자세를 만드는 〈Hooray〉는 사회적 이행 단계에서 개인이 겪는 심리적·물리적 압박을 신체로 받아내는 장치다. 관객이 실제로 몸을 작품에 맞춰 넣을 때, 긴장과 설렘, 주저와 욕망이 엉킨 시작의 이중성을 생생하게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긴장 구조는 〈Tension: Chewing gum〉 시리즈에서 극대화된다. 끈적한 껌이 팔다리에 달라붙어 부자연스러운 걸음을 만드는 형상, 씹고 뱉은 껌이 비정상적으로 쌓인 덩어리, 벽이나 바닥에 붙은 작은 껌 타일은 사회적 강박과 불안이 일상 속 신체의 미묘한 오작동으로 나타나는 방식을 보여준다. 특히 아이리스 러스터 유약을 입혀 반짝이는 껌 타일은 ‘예쁜 불편함’이라는 역설을 구현한다. 규율과 통제가 혐오와 장식, 불쾌감과 매혹이라는 상반된 감각을 동원하며 얼마나 세련된 형태로 일상에 스며드는지 냉소적으로 드러내는 대목이다.

마지막으로 〈Rich Man〉의 청자 작업은 돈과 권력의 이중성을 드러낸다. 두 손을 모아 돈을 구걸하듯 납작 엎드려 조아리는 형태 위에 앉으면, 관객의 몸은 이내 타인을 내려다보는 거만한 자세로 전환된다. 과거 왕실의 보물이었던 청자를 사용함으로써, 작가는 권력이 인간을 비굴하게 만드는 동시에 타인을 내려다보게 만드는 위계 구조를 폭로한다. 박인업의 유려한 곡선은 이처럼 단순한 조형적 아름다움에 머물지 않고, 사회적 위계와 감정의 무게가 신체를 통과하며 남긴 생생한 궤적이다.



III. 이미지의 미끄러짐: 박석의 느슨한 기표

박석의 사진은 19세기 바니타스의 도상학적 규범을 빌려오되, 이를 도덕적 교훈으로 봉인하지 않는다. 대신 사물을 재현และ 은폐 사이의 모호한 틈새에 배치하여, 관객이 의미를 일방적으로 ‘읽는’ 대신 스스로 ‘부여해야만’ 하는 상황을 만든다. 〈Misleading Elements 01 (FACTS)〉는 풍선 효과와 붕괴하는 정물 구도를 통해, ‘사실(fact)’이 결코 단단한 토대가 아니라 언제든 무너질 수 있는 구조물임을 보여준다. 이는 현대 사회가 집착하는 팩트 체크 시스템 자체가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 위에 세워져 있음을 냉소하는 정물이다.

그의 이미지는 시각을 넘어 청각과 제도적 체계의 영역으로 미끄러진다. 〈Image 06〉의 LP와 스크래치는 음악이 주는 위안과 매체의 물리적 취약성을 동시에 상기시키며, 〈Image 07 (Intermission)〉의 막간 이미지는 중단과 공백의 시간을 시각적 정물로 고정한다. 〈Image 04 (Absence)〉 속 텐트와 양떼의 이미지는 보호와 방목, 안식과 통제라는 상반된 메커니즘이 어떻게 하나의 장면 안에 공존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전시 후반부에서 이 느슨한 기표들은 제도적 통제와 집단적 강박을 향해 더 직접적인 비판을 던진다. 〈Image 03 (ƏNISSOXƏ)〉는 위생과 출혈의 대비를 탐미적으로 포장하고, 방사형으로 꽂힌 칵테일 스틱의 구도를 통해 평정과 요란함이 충돌하는 폭발 직전의 긴장감을 정물화한다. 〈Image 08 (Laboratory)〉의 실험실 병과 바코드 이미지는 인간과 세계를 계량하고 분류하는 과학적 객관성이 사실은 코드화된 해석 구조에 지나지 않음을 폭로한다. 〈Image 05 (TOKEN FEAR)〉에 등장하는 첨탑과 키치, 집단적 광기의 도상과 결합될 때, 이러한 기호들은 거대 시스템이 주입하는 공포가 어떻게 개인의 실존적 소외를 정교하게 ‘태깅’하고 분류하는지 선명하게 드러낸다.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태깅 스티커 이미지는 이러한 작업 태도의 연장선에 있다. 내용이 지워진 라벨과 바코드, 채워지지 않은 칸들은 박석이 사용해온 실험실·데이터·관리 시스템의 언어를 추상화한 시각적 장치다. 이 라벨들은 더 이상 정보를 통제하는 도구가 아니다. 도리어 비워짐으로써 관객이 자신만의 언어를 써넣도록 요청하는 느슨한 기표들로 기능한다.



IV. 교차하는 궤적: 길들여진 곡선과 느슨한 라벨

《바니타스의 유령들》은 박인업의 곡선과 박석의 라벨이 서로의 결핍을 비추는 전시다. 세라믹과 브론즈의 곡선은 길들여진 신체의 윤곽을 따라가며, 규율과 감정이 시간 속에서 신체를 어떻게 변형시켰는지 기록한다. 반대로 태깅 스티커와 바코드로 구성된 이미지와 그래픽은 분류와 관리, 통제를 약속하는 듯 보이지만, 끝내 비워진 상태로 남아 관객의 해석 없이는 완결될 수 없는 이름표로 머문다.

이 전시에서 관객은 단지 작품을 ‘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몸과 해석이 어떻게 동시에 길들여지고 또 느슨해지는지 경험하게 된다. 입구에서 신체를 구부려야만 통과할 수 있는 조각을 지나, 실험실 샘플처럼 태깅된 이미지들 앞에 서는 순간 관객은 하나의 질문과 마주한다. “우리는 누구의 라벨 아래에서, 어떤 자세로 살아가고 있는가?”

바니타스의 유령들은 더 이상 죽음을 상기시키는 박제된 상징이 아니다. 이 유령들은 완결되지 못한 의미, 미처 말해지지 못한 감정, 언제든 다시 쓰일 수 있는 라벨처럼 우리 곁을 맴도는 흔적들이다. 박석과 박인업의 작업은 그 흔적들을 이미지와 신체의 언어로 다시 호출하며,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여온 규범과 의미의 구조를 조용히, 그러나 근본적으로 흔들어 놓는다.


기간: 2026. 06. 11(목) - 07.  05(일)

장소: 성수나무 (성덕정길 3-14)



 

전시 위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