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lass Locker

최서희 개인전

조성은 기획

2022. 5. 13 — 6. 5


스쳐지나갈 만한 사사로운 것들 중에서도 유독 잊히지 않는 순간이 있다. 기억의 형태로 저장된 과거의 순간들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파편화되어 본래의 모습보다 차츰 도드라지고 흐릿해지기도 하며 왜곡을 거듭한다. 내면 어딘가에 부유하고 있던 이러한 시간들은 그 순간을 환기하는 누군가와의 대화를 통해서 제 몸체가 없이 불완전한 형체로 타인에게 옮겨간다. 최서희는 이번 개인전 《The Glass Locker》에서 타인의 기억을 조형적 언어로 풀어내며, 전시장을 불특정 다수가 말없이 머무르다 가는 도서관 열람실로 설정한다. 타인과 공동으로 사용하는 도서관의 책과 책상, 의자와 같은 사물에서 누군가의 흔적을 우연히 마주하게 되듯, 개인의 작고 사소한 기억이 심어진 작가의 작업들은 전시장에서 관객에게 감정적으로 공유된다. 전시 제목 ‘The Glass Locker’는 한시적으로 모두에게 점유가 허락되는 공용사물함을 가리키며, 개인적인 영역을 들여다 볼 수 있는 한 켠의 범위를 암시한다.

 

최서희는 직접 만나 대화할 수 있는 가까운 사람 혹은 자신의 기억을 수집하여 재료로 사용한다. 기억을 수집하는 일련의 과정에서 작가는 자신이 설정한 ‘기억 처리 매뉴얼’을 따르는데, 이 과정은 감정을 배제한 채 생생하고도 쓸만한 것들을 선정하고 모으는 채집의 형태와 가깝다. 작가는 이렇게 수집한 기억 재료와 감각적, 언어적 유사성을 공유하고 있는 대상을 영화나 음악, 문학, 역사와 같은 다른 매체에서 탐색하여, 원래의 기억회로에서 분기된 우회로를 찾는다. 이러한 과정을 거친 작가의 조각들은 본래의 모습을 유추할 수 없을 만큼 변형을 반복하며, 감각에 의한 미세한 심상만을 나누는 형태로 나타난다.

 

이번 전시작은 이름 모를 3명의 서사적인 기억과 감정의 비-가시적인 편린이다. 5월의 어느 날, 어수선한 바람에 글라이더를 날리고자 고군분투했던 익명 A가 기억하는 작은 사건은 〈HOW TO SWIM HOW TO FLY〉(2022), 〈릴리엔탈 기념비〉(2022), 〈Sunday August 9 1896〉(2022)으로 가시화되었다. 전시장 중앙에 위치한 고리에 매달려 있는 가방 〈아이스링크 가는 길〉(2022)과 뒤엉켜 있는 〈피자 조와 택시〉(2022) 그리고 그 뒤에 깜박이는 〈경고등〉(2022)은 B의 어린 시절 기억으로부터 파생되었다. 스케이트장에 가던 중 차 사고를 당했던 B의 기억은 뤽 베송의 영화 〈택시〉(1998) 속 한 장면의 시각적 요소를 공유하며 전시장에 옮겨졌다. 붉은 패턴을 지탱하고 있는 책상과 그 위 오브제들은 빨간 에나멜 구두를 신고 맛있는 맛탕을 기대하며 연신 고구마를 캐던 C의 기억이다. 이렇듯 서로 다른 이들의 지극히 평범한 일상에서 마주했던 순간들은 공간을 구성하는 조형적 언어로 우회되어 하나의 서사를 만들어낸다.

 

또한 전시 기간 중 3인의 퍼포머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왜곡되고 흐릿해지는 기억의 메커니즘을 신체의 움직임으로 공간에 그려넣는다. 각 퍼포머는 전시장을 과거와 현재의 시간이 교차하는 지점으로 삼아, 전시작에 담겨 있는 세 가지 기억의 범주 안에서 개별적으로 재해석하거나 혼합하는 방식을 거듭하며 전시의 서사를 확장해간다.


The Glass Locker
최서희 개인전

퍼포먼스 컨셉/디렉션   최서희
안무가   김지윤, 안예빈, 윤효인
기획/글   조성은
디자인   홍앤장디자인사무소
사진   안부
영상   엽태준, 정지웅